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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선 칼럼]내 맘이 이유라는 논리, 의지는 헌법의 언어가 아니다926.09.24/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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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바른사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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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이 이유라는 논리, 의지는 헌법의 언어가 아니다》

- 청와대의 "어차피 임명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말의 위험성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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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선 국민대 법대 교수ㆍ변호사


○ 유치한 건가, 사악한 건가, 무식한 건가.


조희대 대법원장의 재제청 거부에 대해 청와대가 호들갑스럽게 내놓는 반박들을 보면, 이것이 한 국가의 수뇌부에서 나온 말인가 싶어 분노 이전에 국민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다.


청와대의 23일 반박문에 나오는 "임명 거부 입장이 재제청을 요청한 사유"라는 말, 그리고 "임명하지 않을 후보자에 대해 국회에 임명동의안을 제출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그 말에 어떤 책임이 따르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인가.


조희대 대법원장이 요구한 것은 단순하다. 재제청을 요구하려면 헌법적 근거와 구체적 사유를 적으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청와대의 답은 "임명하지 않겠다는 것이 사유"라는 것이다. 왜 임명하지 않는가. 그 답은 없다. 임명하지 않겠다는 의사 자체가 이유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유(reason)가 아니다. 이유의 자리에 의지(will)를 갖다 놓은 것이다.


● 2천 년 전 로마의 어느 아낙네


고대 로마에 유베날리스(Juvenal, 55-140)라는 유명한 풍자시인이 있었다.


그의 풍자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제멋대로 구는 아내가 어느 날 아침 또 무슨 변덕에서인지 남편에게 아무 까닭 없이 노예 한 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닦달한다.


남편이 왜 꼭 그래야 하느냐고 묻자 아내는 이렇게 답한다.

"Hoc volo, sic jubeo, sit pro ratione voluntas.


내가 원하니까요. 그래서 요구하는 거고, 그게 이유죠. 내 의지가 이유를 대신하는 겁니다."

이 일화는 오경웅(吳經熊, John C. H. Wu) 박사의 『정의의 원천』 (이호선 역, 2024)에도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이 짧은 한 문장에 이성에 터잡은 법치(法治)와 의지에 터잡은 인치(人治)차이가 모두 들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13세기 영국 법률가 브랙톤(Henry de Bracton, 1210-1268)의 말을 함께 전한다.


"법이 아닌 의지가 지배권을 휘두르는 곳에는 왕이 없다.“


법의 본질은 의지와 힘이 아니다. 왕도 법을 통해 정당성을 얻는데, 그 왕이 법 대신 의지를 내세우면 왕의 존재 근거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지금 말로 하면, 헌법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대통령은 그 헌법에 기대어 정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쫓겨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이다.


청와대의 논리는 이 막무가내 로마 아낙네의 말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 왜 이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는가?

→ 임명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 왜 국회에 보내지 않는가?

→ 임명하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 왜 재제청해야 하는가?

→ 이미 임명 거부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게 이유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디에도 이유(ratio)가 없다. 의지(voluntas)를 이유라고 강변하고 있을 뿐이다. 2천 년 전 로마의 어느 아낙네의 억지와 다를 바 없는 자가발전 논리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내가 원하니까"가 국가권력의 이유가 되는 순간, 그 권력은 이미 헌법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 이유고지의무는 적정절차의 핵심이다


이유를 대라는 요구는 대법원장의 자존심이 아니다. 근대 법치주의가 국가권력에 부과한 가장 기본적인 의무다.


권력이 누군가의 권리나 지위에 불리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반드시 그 이유를 밝혀야 한다는 것, 이른바 이유고지의무(duty to give reasons)다. 이것은 청문권과 함께 적정절차(due process)의 두 기둥을 이룬다.


작은 사례 하나를 보자. 벨기에에서 축구코치 자격을 딴 하일렌스라는 사람이 프랑스에서 일하려고 코치 자격 인정을 신청했는데, 프랑스 당국은 뚜렷한 이유 없이 이를 거부했다. 그는 무자격으로 코치 일을 하다가 기소되었다.


1987년 유럽재판소는 이 사건에서, 직업을 허용하지 않으려면 왜 그런지 합리적인 이유가 주어져야 하며, 이유 없는 거부는 당사자가 다툴 수도 없고 법원이 심사할 수도 없으므로 공동체법의 일반원칙에 반한다고 판결했다.


축구코치 자격 하나를 거부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연합은 일찍부터 그 기관의 모든 결정에 이유 설시를 요구하고(구 EC조약 제253조, 현 EU기능조약 제296조), 유럽재판소는 이유가 빠진 결정을 필수적 절차요건의 흠결로 보아 무효로 선언해 왔다.


1994년 집행위원회가 독일의 어느 개별법이 조약에 부합한다고만 적고 왜 부합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은 결정을 내렸을 때, 재판소는 그 결정을 무효로 했다.


결론이 옳은지를 따지기도 전에, 이유가 없다는 것만으로 무효라는 것이다. 우리 행정절차법 제23조가 처분에 이유 제시를 요구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이유고지의무가 적정절차의 핵심인 까닭은 세 가지다.


첫째, 이유가 있어야 상대방이 다툴 수 있다. 이유가 없으면 반박할 대상도 없다.


둘째, 이유가 있어야 제3자가 심사할 수 있다. 법원이든 국회든 국민이든, 이유가 없는 결정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다.


셋째, 이유를 대야 하는 순간 권력은 스스로 이성에 구속된다. "내가 원하니까"를 이유로 적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유고지의무는 권력에게 이성의 언어로 말하라고 강제하는 장치다.


이 원칙은 행정기관이 국민을 대할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헌법기관이 다른 헌법기관의 권한 행사를 거부할 때에는 더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국민 한 사람의 축구코치 자격을 거부하는 데도 이유가 필요하다면, 최고법원의 수장이 헌법에 따라 행사한 제청권을 거부하는 데 이유가 필요 없을 리 없다.


그런데 청와대는 이유를 묻는 대법원장에게 "임명 거부 입장이 사유"라고 답했다. 결정의 결론을 결정의 이유라고 내놓은 것이다.


하일렌스에게 "자격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으니 그것이 이유"라고 답한 프랑스 당국과 다를 바 없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요구한 것은 정확히 이 원칙이다. 재제청을 요구하려면 왜 이 후보자가 안 되는지, 그 헌법적 근거가 무엇인지 적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적히지 않은 요구는 다툴 수도 없고 심사할 수도 없으므로 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고집이 아니라 적정절차의 요구다. 이유 없는 요구에 응하는 것이야말로 이유 없는 권력 행사를 승인하는 일이다.


● 의지를 발동하더라도 번지수가 틀렸다


백 보를 양보하여 대통령에게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하면 임명을 거부할 수 있다"는 청와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 그래도 지금의 행위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 의지를 발동할 요건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헌법 제104조 제2항의 순서는 명확하다.


대법원장의 제청 → 국회의 동의 → 대통령의 임명


대통령의 임명권은 이 절차의 마지막 단계에 있다. 임명을 거부할 권한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임명권이 행사될 단계, 즉 국회의 동의 뒤에 온다.


국회가 동의한 후보자를 놓고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때 비로소 "대통령이 임명을 거부할 수 있는가"라는 논쟁이 성립한다.


그런데 청와대는 국회가 동의할지 말지 판단하기도 전에 "어차피 임명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결론을 먼저 내리고, 그 결론을 근거로 국회에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의 권한을 중간 단계에서 미리 행사한 것이다. 이것은 임명권의 행사가 아니라 임명권을 구실로 한 절차의 차단이다.


다시 유베날리스의 '내 맘이야' 부인에게로 돌아가 보자.


로마법에서도 주인이 노예를 처벌하려면 나름의 절차가 있었다. 그 아낙의 문제는 이유가 없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유 없는 의지를 절차보다 앞세운 것도 문제였다.


청와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임명할 의사가 없다"는 의지를 헌법이 정한 절차의 한가운데 끼워 넣어 그 뒤의 단계를 모두 지워 버렸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국회 동의를 받은 후보자의 임명을 거부하는 것은, 그것이 위헌인지는 별론으로 하고, 적어도 대법원장의 제청권과 국회의 동의권이 모두 행사된 뒤에 벌어지는 일이다. 두 헌법기관의 권한은 온전히 행사되었고, 남는 것은 대통령의 정치적·헌법적 책임뿐이다.


반면 지금처럼 국회에 보내지 않는 것은 국회의 동의권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국회는 검증할 수도,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없다. 한 헌법기관이 다른 헌법기관의 권한 행사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한 것이고, 이것은 임명권의 범위를 아무리 넓게 보더라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중대한 헌법위반의 여지가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청와대는 "임명하지 않을 사람을 국회에 보내는 것이 모순"이라고 했다. 말장난이다. 모순은 청와대와 민주당에 있다. 임명권은 국회 동의 다음에 오는데, 국회 동의 전에 임명 거부를 이유로 절차를 끊는 것이야말로 자기 권한의 자리를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이다.


특정 후보자를 임명하기 싫으면 한 패거리인 절대다수의석 민주당을 통해 국회에서 부결하면 된다. 어디 한두 번 해 봤나. 그걸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다.왜 잘하던 주특기를 갑자기 안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이 상황에서 만에 하나 국회가 동의하면 대통령은 그때 거부할지를 정하면 된다.


어느 쪽이든 국회에 보내지 않을 이유는 없다. 보내지 않는 것은 헌법이 정한 순서와 단계를 대통령 한 사람의 의지로 바꾸는 것이다.


의지를 발동하더라도 헌법이 정한 순서에 따라 발동해야 한다. 그것이 의지에 터잡은 권력과 법에 터잡은 권력의 마지막 경계선이다. 이 선을 넘는다면 명백한 탄핵 사유가 된다.



● 이 논리대로라면 국회는 거수기로 남아야만 한다


청와대의 주장을 잘 들여다보면 얼마나 황당한지 알게 된다. 청와대의 논리는 이렇게 완성된다. 대통령이 임명할 사람만 보낸다.


국회는 그 사람에 대해 동의 여부를 판단한다. 그런데 국회가 부동의하면 대통령의 임명 의사와 어긋난다. 이것은 모순 아닌가.


임명하지 않을 사람을 보내는 것이 모순이라면, 임명할 사람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도 같은 논리로 모순이 된다.


결국 국회는 대통령이 임명할 사람에게 동의하는 절차로만 남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거수기가 되라는 것이다.


청와대는 스스로를 왕 개구리로 착각하고 있는 건가. 그런데 옛날 왕도 이렇게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청와대는 "국회를 존중하는 자세"를 말했다. 그러나 국회를 존중한다면, 대통령이 내심 임명하지 않겠노라 벼르고 있다 하더라도 일단 국회에 검증절차를 거쳐 동의 여부를 결정할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


국회의 판단 기회를 원천 박탈하는 것은 헌법이 국회에 준 동의권을 대통령의 임명 의사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국회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오만함의 원천은 용감함인가, 무지함인가.


●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셈"이라는 반박에 대하여


청와대는 대통령이 제청에 기속된다고 보면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임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된다. 대통령이 이유 없이 제청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올 때까지 재제청을 요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통령이 대법관을 제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헌법은 대법원장에게 제청권을, 국회에 동의권을, 대통령에게 임명권을 주었지 어느 하나에게 나머지를 모두 주지 않았다.


대통령이 제청에 완전히 기속되는가는 논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논쟁의 어느 쪽에 서든 최소한의 전제는 같다. 거부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헌법기관이 다른 헌법기관의 권한 행사를 거부하려면 "적임자가 아니다"라는 결론이 아니라 왜 적임자가 아닌지를 말해야 한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지금 청와대가 법치 아닌 인치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완곡하게 지적하고 있는데, "반통령"과 그 옹위대는 이 말을 그렇게도 못 알아 먹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며 추석 명절에 국민 염장 지르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내 맘이야"를 외치는 것은 어린아이의 유치함이나 할 말 없는 시정잡배들의 멱살잡이에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이다. 계속 그러다가 남는 것은 얻어터지고 쫓겨나는 것 밖에 없다.


● 법이 아닌 의지는 헌법 파괴의 선언


브랙톤 이후 에드워드 3세(Edward III, 재위 1327-1377) 시대의 법원 연감(Year Book)에 실린 대화가 하나 있다.


힐러리(Roger Hillary) 판사가 "판사 마음이오"라고 하자 민사법원장 스토노어(John Stonore, ?-1354)는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아니오, 법은 이성이오.“


법이 의지가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법이 아니라, 그냥 막무가내요, 전제 군주의 변덕일 뿐이다.


"내가 원하니까"가 헌법절차를 중단시킬 수 있는 이유가 된다면, 그 논리는 여기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다음 대통령도 원하는 사람이 올 때까지 대법원장의 제청을 서랍에 넣어 둘 것이다. 그 다음 대통령은 국회가 동의한 사람도 "임명할 의사가 없다"는 이유로 임명하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이성과 이유(reason)의 자리를 의지(will)에 내주면 되찾기 어렵다.


헌법은 권력자의 선의를 믿고 만든 문서가 아니다. 권력자가 "내가 원하니까"라고 말할 때 그 말이 이유가 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다. 대법관 임명절차를 세 기관에 나누어 놓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장치를 "어차피 임명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한마디로 무너뜨린다면, 후보자 한 사람이 임명되고 안 되고의 문제를 훨씬 넘어선다.


헌법이 의지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세워 둔 법이라는 이성 자체가 무너지는 것이다.


Hoc volo, sic jubeo. 내 맘이야, 어쩌라구. 그게 이유야!

유베날리스의 풍자시를 21세기 대한민국 청와대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탄핵이라는 소리가 들려도 이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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