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선 칼럼]종이 위의 헌법, 무엇을 쓰느냐가 아니라, 누가 쓰느냐를 먼저 물어야 한다(26.09.27/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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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위의 헌법, 무엇을 쓰느냐가 아니라, 누가 쓰느냐를 먼저 물어야 한다》
- 스탈린 헌법은 아름다웠다 -
2026-09-27

이호선 국민대 법대 교수ㆍ변호사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6/09/23/2026092300312.html
Q. 다음 중 1930년대를 기준으로 지구 상에서 가장 민주적 헌법을 가졌던 나라는 어디일까?
(1) 스웨덴 (2) 스위스 (3) 미국 (4) 소련 (5) 영국
눈치빠른 분들은 바로 정답을 맞췄을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이다. 적어도 그들 스스로는 그렇게 불렀다.
저 링크 기사 관련 뉴데일리 기자와 전화 인터뷰를 했는데 민주당 주도 개헌에 대한 내 생각을 비교적 충실히 옮겨 주었는데 스탈린 헌법 이야기만 빠졌다.
1936년 스탈린 헌법이 최고의 민주(?) 헌법이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걸 쓰라고 했는데, 지면 사정인지, 아니면 민감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사실 인터뷰하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그 대목이었다. 그래서 여기에 보탠다. 헌법에서 본질적인 것은 무엇을 쓰느냐가 아니다. 누가, 어떤 의도로 쓰느냐다.
● 1936년, 모스크바의 화려한 진열장
1936년 12월 5일, 제8차 임시 소비에트 대회가 새 헌법을 채택했다. 이름하여 스탈린 헌법이다. 위원장은 스탈린이었지만, 문장을 다듬은 것은 당대 최고의 이론가 부하린(Nikolai Bukharin, 1888-1938)과 라데크(Karl Radek, 1885-1939)였다.
조문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 선거는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제134조)였다. 직전까지는 헌법에서 옛 귀족 · 성직자 · 부농의 선거권을 박탈했었는데, 그 차별을 없앴다.
○ 일단 남녀평등(122조), 민족·인종 평등(123조)은 기본으로 깔고, 교육권(121조)과 노동권(118조), 휴식권(119조), 여기에 노후 · 질병 보장(120조)까지 넣었다. 전후 영국 노동당의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서방에서는 사회권이라는 권리 자체가 낯선 개념이었다.
○ 표현의 자유는 가히 환상적이다. 언론·출판·집회·시위의 자유(125조)는 당연히 보장되고, 이를 위해 인쇄소와 종이, 공공건물을 근로자에게 제공해 '물질적으로' 보장한다고까지 못 박아 두었다.
○ 신체의 자유 또한 빠질 수 없다. 법원 결정이나 검사 승인 없이는 체포할 수 없음은 물론(127조), 주거 불가침과 통신 비밀까지(128조), 시대를 앞서 나간 진정한 인권의 수호자였다.
○ 거기에 연방 구성국은 연방에서 탈퇴할 권리까지 있다(17조). 개인 뿐만 아니라 민족들에게도 자결과 선택권이 부여된 최고의 연방 시스템을 추구한다는 것이 소련 헌법이었다.
1930년대에 사회권을 이렇게 빼곡히 헌법에 적은 나라는 드물었다. "부르주아의 자유는 돈 있는 자만 누리는 형식적 자유지만, 우리는 인쇄기와 종이까지 대주는 실질적 자유를 준다"는 논리는 대공황에 지친 서구 지식인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제정 과정도 연출이었다. 초안을 수개월간 '전 인민 토론'에 부쳤고, 수천만 명이 참여했다고 선전했다.
영국의 시드니·비어트리스 웹(Sidney & Beatrice Webb) 부부는 1935년에 소련 견문록을 내면서 "소비에트 공산주의: 새로운 문명인가?"라는 제목을 달았었는데, 1937년 판에서는 제목 끝의 물음표가 사라졌다. 스탈린 헌법에 감동한 것이다.
사실 이 부부 뿐만 아니라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이 스탈린 헌법에 껌벅 죽어 미래는 소비에트식 사회주의에 있다고 믿었다. 그 때 훼까닥 했던 어설픈 지성 놀음이 일제 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퍼졌고, 공산주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의 뿌리가 되었다.
● 같은 시간, 같은 나라
그런데 이 헌법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면 두번째로 입이 벌어진다.
1937년 7월, 내무인민위원부(NKVD) 명령 제00447호가 떨어졌다. 3인 위원회, 이른바 트로이카가 재판도 없이 사람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1937~38년 두 해 동안 총살된 사람만 공식 기록으로 68만여 명이다. 이름하여 모스크바 재판, 대숙청이다.
"법원 결정 없이는 체포할 수 없다"는 헌법 127조가 버젓이 살아 있던 때다.
헌법 문장을 다듬은 부하린은 1938년 3월 공개재판 끝에 총살됐다. 라데크는 1937년 재판에서 징역 10년을 받고 수용소에서 살해됐다. 자기가 쓴 헌법의 보호를 가장 먼저 받지 못한 사람들이 바로 그 헌법을 쓴 사람들이었다.
화려한 문장과 피비린내 나는 현실이 한 인간에 의해, 같은 시간대에, 같은 공간에 펼쳐졌다. 바깥에서 몰랐을 뿐.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나. 답은 바로 그 헌법 안에 있었다.
● 첫째 덫: 자유에 꼬리표를 붙이다.
스탈린 헌법 제125조에 따르면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는 "근로자의 이익에 부합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보장된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당연히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다.
'근로자의 이익'이란 도대체 뭔가, 그걸 누가 정하는가. '사회주의 체제 강화'를 위하여 필요한지, 필요없는지는 누가 정하는가? 누가? 당연히 당이고, 그 정점에는 서기장 동지 스탈린이 있다.
헌법에 쓰여진 것은 처음부터 자유가 아니었다. 자유를 준 것이 아니다. 허락된 말만 할 자유를 준 것이다.
● 둘째 덫이자 만능 키: 제126조
스탈린 헌법 제126조는 결사의 자유 조항인데, 노조, 협동조합, 청년 조직, 체육·국방 단체, 문화·과학 단체를 만들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끝에 한 문장이 따라 온다.
"가장 적극적이고 정치적으로 가장 자각한 시민들은 소련 공산당(볼셰비키)으로 결집하며, 당은 (중략) 사회단체와 국가기관을 막론한 모든 근로자 조직의 지도적 핵심이다."
이 한 문장 하나가 앞에 있는 화려한 헌법 조문들을 그냥 삼켜 버렸다.
첫째, 여기에 등장하는 당, 헌법에 이름이 오른 정당은 하나뿐이다. 스탈린은 헌법 초안 보고에서 적대 계급이 없는 사회에 여러 정당이 있을 근거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둘째, 당이 국가기관을 '지도'한다는 것은 최고소비에트도, 법원도, 검찰도 당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헌법이 스스로 헌법 위의 권력을 승인한 것이다.
셋째, 선거 후보 추천권은 당이 지도하는 조직들에 있었고(141조), 그 결과 자연스럽게 선거구마다 후보는 한 명이었다. 단일 후보였다.
비밀 · 평등선거란 이름 하나에 찬성표를 넣는 절차였다. 비밀 투표를 보장하기 위해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찬성표를 던지면 부스 안에 들어가지 않고 투표용지를 받는대로 바로 투표함에 넣으면 되었다. 다시 말해 부스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반대표라는 것을 드러내는 행위였다.
넷째, 제125조의 "근로자의 이익"을 누가 해석하는지에도 제126조에 답이 있다. 전위인 당이다. 어머니 당이 모든 걸 해석한다.
화려한 권리 목록은 진열장이었고, 스탈린 헌법 제126조는 그 진열장의 열쇠였다. 그리고 열쇠는 당이 쥐고 있었다. 이 황당한(골수 한국 좌파들에게는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조항은 스탈린이 죽고 나서도 1977년 브레즈네프 헌법 제6조로 이어졌다. 당 독점이 헌법에서 빠지게 된 것은 1990년 고르바초프의 개혁에 와서였다.
그런데 아직도 이런 식의 헌법을 갖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북한이다. 먼 나라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
조희대 대법원장의 대법관 재제청 거부에 대해 악다구니를 쓰는 청와대의 무지함과 억지를 비판하면서 로마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Juvenal, 55-140)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의 작품에 이런 구절도 있다.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누가 감시자를 감시하는가?"
스탈린 헌법의 문제가 정확히 여기에 해당한다. 온갖 권리를 적어 놓고, 그 권리를 지키는 자리에 권리를 빼앗을 자를 앉혀 놓았다.
미국 헌법의 설계자 중 한 명이었던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1836)은 권력의 경계를 헌법에 정밀하게 그어 놓는 것만으로는 권력의 침탈을 막을 수 없다고 이미 경고했다. 1788년의 일이다. 그는 이것을 '양피지 장벽(parchment barriers)'이라 불렀다.
그래서 미국 헌법은 권리 목록보다 권력을 쪼개고 서로 견제하도록 하는데 공을 들였다. "야심에는 야심으로 맞서게 하라(Ambition must be made to counteract ambition, 페더럴리스트 제51편)."는 지침은 아주 현실적인 설계였다.
스탈린 이후에도 헌법을 온갖 꽃 바구니로 채우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있었다. 물론 그런 곳일 수록 후졌다는 건 두말할 필요없다.
일례로 1999년 베네수엘라 헌법은 350개 조문에 온갖 권리를 담았다. 지금 베네수엘라가 어떤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헌법이 화려하다고 나라가 잘 굴러가는 게 아니다. 종이 위의 문장은 지킬 뜻이 없는 자의 손에 들어가면 장식품이 된다. 장식품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흉기가 된다.
● 그래서 지금의 민주당 주도 개헌은 위험하기 그지 없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1936년의 소련과 같지는 않다. 우리에게는 복수정당이 있고, 국민투표가 있고, 헌법재판소도 있다면 있다고 할 수 있고, 언론도 아예 없느니만 못한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헌법을 주물럭거려보고자 하는 그 음험함은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
헌법을 누가, 무엇을 위해 고치느냐, 개헌을 하느냐 마느냐 보다 먼저 우리가 합의해야 할 내용은 이런 것들이다.
○ 입법권을 장악한 절대다수 여당에 기회봐서 한 몫 끼어들어 내각제 비스무리하게 토호 정치세력으로 자기 보존하려는 기회주의자들이 주도하는 개헌, 여기에 동의하는가.
○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은 사건을 전문에 넣어 성역으로 만들고, 다른 말을 하면 '헌법 정신 위반'이 되는 금기의 영역을 만들려는 노골적 시도에 동의하는가.
○ 제왕적 대통령제를 고친다면서 정작 300명 국회의원의 권한을 키우고, 국민 앞에 책임지는 시스템은 저멀리 던져 버리고 정치를 세습 직역으로 만들려는 여의도 이권 공동체 중심 구조로 가는데 동의하는가.
○ 검찰청 해체, 대법관 증원, 그리고 이제는 대법원장의 제청마저 "내 맘이야"로 막아서고 탄핵 공갈을 일삼는 이런 정치행태를 헌법으로 추인하는데 동의하는가.
● 소가 웃을 일 하지 말라
스탈린 헌법 제125조가 "근로자의 이익"이라는 꼬리표로 자유를 묶었듯, 헌법 전문에 박힌 한 줄이 "헌법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사상과 표현을 묶을 수 있다. 스탈린의 126조가 단 한 문장으로 당을 국가 위에 올려 놓았듯이, 권력구조 한 조항이 국민 머리 위에 국회를 올려 놓고, 신 계급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아니 이미 지금 헌법 한 줄 고치지 않고서도 헌법의 알갱이는 도둑질 당하고, 새로운 수탈층이 생기는 중 아닌가.
멋진 헌법 만든다고? 스탈린한테 물어봐라. 그도 헌법을 아름답게 쓸 줄 알았다. 문제는 문장이 아니라 그 속내이다. 그래서 거듭 말하지만, 개헌을 하려면 정치권은 빠져야 한다. 잠시 비켜나 있는 것이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된다.
권력을 쥔 자가 자기 권력의 한계를 정하는 헌법을 쓰겠다는 것, 그것이 바로 감시자가 스스로를 감시하겠다는 말이다. 소가 웃을 일이다.
헌법은 권력자의 선의를 믿고 만드는 문서가 아니다. 권력자의 악의를 전제하고 만드는 문서다.
Quis custodiet ipsos custodes?
누가 쓰는가를 먼저 물어라. 무엇을 쓰는가는 그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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