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민 정치평론] 외국의사 진료허용에 ‘김동인의 감자(1925)’가 연상되는 이유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른사회 댓글 0건본문
외국의사 진료허용에 ‘김동인의 감자(1925)’가 연상되는 이유
보건복지부는 악수에, 최악수(最惡手)를 두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외국면허 의사에게도 국내 진료를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르면 이달 말부터 외국 의사면허를 가진 사람들도 우리나라에서 진료·수술 등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고 한다. 의료경보 ‘심각’ 단계에서 집단 사직서를 낸 전공의(專攻醫)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것이 복지부의 입장이다.
보건복지부의 이러한 조치를 전해 들으면서 문득 김동인의 1925년 자연주의 단편소설 ‘감자’가 오버랩 됐다. 전혀 다른 맥락 같지만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1925년 김동인의 ‘감자’를 소환한다
감자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농촌에서 가난하지만 도덕적인 성품으로 자란 ‘복녀’는 가난 때문에 돈에 팔려 나이 많은 홀아비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극도로 게으른 남편 때문에 농사지을 땅을 빌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자 칠성문 밖 빈민굴로 밀려나고 만다. 그곳에서 복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구걸을 하다가 관청에서 빈민구제사업으로 벌인 송충이 잡이 인부로 일을 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감독에게 매춘을 하면서 쉽게 돈 버는 일에 눈을 뜨게 된다. 그 때부터 복녀의 도덕적 성품은 무너진다.
그러던 중 중국인 ‘왕서방’의 밭에 감자를 훔치러 갔다가 왕서방에게 들키면서 그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가진다. 그러다가 왕서방이 처녀를 사서 장가를 들게 되자 애욕에 눈이 먼 복녀는 결혼식 날, 낫을 들고 왕서방을 찾아갔다가 오히려 그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복녀의 시체 앞에 ‘복녀의 남편, 왕서방, 한방 의사’가 마주 앉았다. 복녀의 남편과 한방의사의 손에는 십원짜리 지폐 3장과 2장이 쥐어졌다. 이튿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의사의 진단으로 공동묘지에 실려 간다.
감자는 ‘복녀의 타락과 비극’을 그리고 있다. 그녀가 상대했던 남자가 같은 조선인 근로감독관에서 중국인으로 바뀌면서 복녀의 타락은 심도를 더한다. 복녀는 왕서방의 결혼을 막을 위치에 있지 않았음에도 무리를 하게 되고, 결국 살해되는 비극을 맞게 된다. 타락은 결국 비극을 불러온다.
검증되지 않은 외국의사 국내진료 허용, 최악수만 골라두는 보건복지부
보건복지부는 의료경보 ‘심각’ 단계에서 외국면허 의사의 국내 진료를 허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보건복지부는 이런 내용을 담은 의료법 시행규칙 일부 개정안을 20일까지 입법 예고한다고 8일 밝혔다. 정부는 전공의 집단 사직 이후 지난 2월 23일 보건의료 재난 경보단계를, ‘관심-주의-경계-심각’에서 가장 높은 단계인 ‘심각’으로 끌어올려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심각’ 단계에서 외국면허 의사의 국내 진료 허용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왜 의료경보 ‘심각’ 단계인지를 세겨봐야 한다. 감염병 창궐이 아닌 전공의 집단사직이 초래한 ‘심각’ 단계인 것이다. 자연재해가 아닌 의료정책 실패에 따른 ‘인재(人災)’에 외국의사를 투입하겠다는 것은 ‘이해불가’의 경솔한 정책행태가 아닐 수 없다.
어느 나라든지 의료서비스 공여는 엄격한 ‘질(質) 규제’를 받는다. 의사면허는 운전면허와 다르다. 한국 의사면허 소지자가 미국에서 진료행위를 하려면 미국의사 면허를 다시 따야 한다. 한국 의사면허는 ‘미국에서 의사면허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으로만 인정된다. 마찬가지로 외국 의사면허 소지자가 우리나라에서 의사가 되려면 복지부가 인정하는 나라에서 복지부가 지정하는 외국 의대를 나온 뒤 외국 의사 면허를 따고, ‘한국 의사면허 국가고시’까지 붙어야 한다. 외국 의사가 ‘한국의사 국가고시’를 보기 위해서는 외국인을 위한 예비시험을 치러야 한다. 외국의사의 예비시험 합격률은 55%, 한국 국가고사 합격률은 34%선이다. 두 시험 모두 합격하는 성공률은 19%(=0.55*0.34)이다.
그러나 보건의료 재난 경보 ‘심각’ 단계에선 시행규칙 변경에 따라 나라·학교 제한 없이 외국 의사면허만 갖고 있으면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정기간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현행기준 대로라면 외국인 의사 19%만 합격해야 하는데, 자격 미달자 81%에게도 진료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의료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한국의 기준에 미달하는 외국 의료진에 내국인의 건강을 맡기는 것은 무책임을 넘는, 의료정책의 탈선과 타락이 아닐 수 없다. 소설 감자에 나오는 복녀의 타락과 다를 바 없다.
정부는 의료인력 수입 대신 ‘의료경보 심각단계’를 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려면 정책 독선과 아집에서 벗어나 합리의 원칙에 의거해 ‘제로 베이스에서 의료개혁을 재논의’해야 한다. 의대정원 확대가 의료개혁일 수는 없다. 지난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가장 큰 이유는, ‘의대증원 2000명’을 무슨 성역인 양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런 실패를 겪고서도 정부는 반성의 빛 없이 더 센 강공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것이다.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자. 의대증원의 최대 논거는 한국에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0년 현재 인구 천명당 한국의 의사 수는 2.5명으로 프랑스 3.2명, 독일 4.5명, OECD 평균 3.7명에 비해 적다. 하지만 ‘양적 지표’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회피가능한 질병으로부터의 사망통계’는 전혀 다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2019년 기준 ‘예방가능한 질병으로 인한 사망’(mortality from preventive causes)과 ‘치료가능한 질병으로 인한 사망’(mortality from treatable causes)은 OECD 평균보다 압도적으로 낮아, 한국의 의료서비스 질이 OECD에 비해 유의하게 높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1년간 인당 진료 회수’(17.2)도 OECD(6.8)보다 월등히 높다. 한국의 의료문제의 본질은 ‘의사 수의 부족’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지역·필수의료 파행’ 문제도 본질은 ‘시스템의 문제’로 의대 입학정원이 부족해서 유발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의사가 부족한 진료과목은 흉부외과, 소아청소년과, 외과, 산부인과, 응급의학과 순이다. 이들 진료과목은 필수 의료분야로 분류된다. 정부의 요구대로 의대 정원을 대폭 늘리더라도 의사가 부족한 진료과목으로 미사일이 유도되듯이 의사 자원이 ‘그 쪽으로’ 배분되지 않는다. 필수의료 기피 현상은 ‘낮은 의료수가’ 그리고 ‘의료사고에 대한 법적 보호 부재’에 기인한 것이다.
인간은 유인에 반응한다. 2021년 통계에 따르면 활동 의사 11만명 중 ‘피부 및 미용 종사’ 의사 수가 3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피부암을 치료하는 의사보다 피부의 점을 빼는 의사가 돈을 더 벌 수 있다면 필수의료 기피현상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고령화에 따른 노인인구 증가도 의사수를 늘리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고령화 대비책은 간병수요를 어떻게 충족시키느냐의 문제로 의사 증원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간병과 요양 시스템을 손보는 것이 더 급한 과제이다.
여당은 총선에 참패하고서도 소모적인 ‘기 싸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의사가 정부의 무릎을 꿇렸지만 이번에는 다르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전공의가 돌아오지 않으면, 한발 더 나아가 전공의가 돌아오지 못하도록 외국인력을 쓰겠다”는 오기를 부리는 것이다.
‘김동인의 감자’로 돌아가 보자. 복녀가 근로감독관과 통정하다가 상대를 바꿔 중국인 왕서방과 통정한 것은 타락의 심도(深度)가 다르다. 근로감독관과의 통정은 ‘복녀가 가난했기에’ 용서될 수 있지만 왕서방과의 통정은 복녀가 가난해서가 아니다. 윤석열 정부의 ‘오만, 독선 그리고 불통’은 총선 실패 후에도 여전하다. ‘사회적 기구를 만들어 중지를 모아야 할 일을 윤대통령이 홀로 밀어붙이는’ 형국이다. 윤대통령은 무오류의 신(神)이라도 되는 듯 행동한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의대정원 확대와 같은 의료개혁에 민주당도 적극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한 가지 짚을 게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의대정원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할 때, 야당은 팔장끼고 반사이익을 취했을 뿐이다. 의료개혁에 협조하겠다는 것은 ‘립(lip) 서비스’인 것이다.
오해 살 수도 있는 ‘한·중 보건위기 공동대응’
오비이락(烏飛梨落)인가? 복지부 박민수 차관은 4월 25일 중국 왕허성 국가위생건강위원회 부주임(차관)을 만나, 글로벌 공중보건 위기 공동대응을 포함한 보건의료분야 협력 강화를 논의했다고 밝혔다. 양측은 공중보건 위기 시 국제적 공조의 중요성에 공감했고, 팬데믹 조약 등 세계보건기구 차원에서 진행되는 현안 논의에 적극 참여하고 입장을 공유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팬데믹이 끝난 상황에서 한·중 간의 현안 논의는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박민수 차관은 4월 만남에서 지난해 12월 개정·체결한 한·중 보건의료협력 양해각서에 따라 감염병·재난의 신속하고 효과적인 대응을 위한 양국 정부당국 및 전문가 간 교류와 협력을 정례화할 것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중국이 글로벌 보건 거버넌스 구축을 위해 양국의 협력체계를 구체화해 나가자고 화답했다”고 밝혔다. 한·중 공중보건 책임자 간 소통에 대해 이의를 달 생각은 없지만 우려되는 바가 없지 않다. 혹여 “외국의사 국내진료 허용을 두고 중국과의 물밑 접촉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의구심이 바로 그것이다. 외국의료 인력의 국내 진출을 막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국 등 선진국 의료인력의 국내 진입이다.
복지부, 합리적 숙고와 연착륙으로 의료파행 해소해야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조치로 외국의사들의 수련병원 등 대형병원에의 배치를 위한 ‘의료법 시행규칙 일부 개정’은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선택지가 될 것이다. 인력수입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한시적으로 외국의사의 국내진출을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서는 안 된다. 소설 ‘감자’에 나오는 복녀 시신 앞에 모인 3사람, “복녀 남편, 왕서방, 한방의사”는 한국적 현실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오류의 독단과 독선’이 한국의 의료시장을 질식시키고 있다. OECD 회원국에서 지금 한국과 같은 의·정 갈등을 겪는 또 다른 국가가 있는지 모르겠다.
복지부와 의사협회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협상 테이블에 다시 앉아야 한다. 차제에 의사인력 수급계획 수립을 위한 ‘복지부 관료와 의사 그리고 의료소비자’로 구성된 독립적·사회적 기구 설립을 검토해야 한다. 미래의 의료수요와 의사의 전문성이 고취되는 선에서 복지부와 의사협회는 ‘합리적이고 점진적인 의대정원 증원’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2024. 05. 13.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